보도자료
성수청(星宿廳:창덕궁 옆 소격서와 정업원 사이)
 김민수
 2012-10-18 21:40:38  |   조회: 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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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청(星宿廳:소격서와 정업원 사이 창덕궁 옆)




성수청(星宿廳)은 조선시대 전기에 나라무당인 국무(國巫)가 국가와 왕실을 위해 기복(祈福)하고 재앙(災殃)을 물리치는 나라굿을 관장한 국가 공식 무속(巫俗) 전담 관아이고 성신청(星辰廳)이라고도 하며 도교의 초제(醮祭)를 관장한 소격서(昭格署)와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단종(端宗)의 명복(冥福)을 빈 여승방(女僧房) 정업원(淨業院) 사이 창덕궁 옆 장악원 제조(掌樂院 提調) 임숭재(任崇載)의 집 북쪽에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별기은(別祈恩)이라는 불교와 도교적 성격의 국행(國行)의례가 있었고 무속적 별기은제(別祈恩祭)는 조선 전기로 이어졌는데 국무(國巫)를 두어 무녀들과 광대를 불러 악기를 울리며 왕실의 복을 비는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나라굿을 거행하였다. 조선시대에 존숭받던 신격(神格)은 덕적(德積:개풍)· 백악(白岳:한성)·송악(松岳:개경(開京))·목멱(木覓:한성)·감악(紺岳:파주)·개성대정(開城大井)·삼성(三聖: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詞))·주작(朱雀) 등의 팔대왕(八大王)이었다. 대표적인 제장인 국무당(國巫堂)은 송악(松岳:개성)에 있었으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증손자 이심원(李深源), 남효온(南孝溫) 성현(成俔) 등 사대부들은 성수청의 존속을 강하게 비난하고 혁파할 것을 요구했다. 1477년 9월 9일 심원(深源)이 아뢰기를,“창덕궁 옆 성수청(星宿廳)의 수리를 명하셨습니까?”하니 조선국 9대 국왕 성종(成宗)이 말하기를“경의 말은 옳으나 내가 처음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조종조 때에 시작한 것이다.”하였다. 심원이 또 말하기를,“국왕(國王) 탄일(誕日)을 사찰에서 하례(賀禮)하는 축수재(祝壽齋)는 위를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옛말에 ‘복을 구하기를 간사한 데 하지 말라.’ 하였고, ‘제 귀신이 아닌데 제사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능히 어진 정사를 행하면 근본이 굳어지고 나라가 편안하여 한없이 수고(壽考)할 것인데, 어찌 건전하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종교 사도(邪道)에서 복을 구하겠습니까? 큰 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고 반드시 그 수(壽)를 얻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윤자운(尹子雲)이 말하기를,“수를 빌어 송도(頌禱)하는 것은 위를 위하는 일이니 비록 정도(正道)가 아니더라도 갑자기 고치기 어렵습니다.”하고, 심원이 말하기를,“윤자운의 말은 그릅니다. 축수(祝壽)할 때를 당하여 유식한 자가 외양으로는 따르고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조종조의 일이라 하더라도 만일 도(道)가 아니면 어찌 3년을 기다리겠습니까? 청컨대 급히 파하소서.”하였다.


1478년 11월 30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성현(成俔) 등이 상소(上疏)하기를,성수청(星宿廳)을 아직도 성(城) 안 창덕궁 옆에 두고 기은사(祈恩使)가 봄·가을로 끊이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서 백성만 못하게 한다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일찍이 기은사(祈恩使)의 행렬(行列)을 보건대 한성(漢城)에서 개경(開京)까지, 개경(開京)에서 적성(積城)·양주(楊州)의 경계(境界)에 이르기까지 말을 탄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하고, 그 동복(僮僕)과 짐바리 치중(輜重)은 배가 되는데, 혹은 가고, 혹은 머물면서 머뭇거리고 떠나지 않으면 수령(守令)들이 국궁(鞠躬)하고 숨을 죽이며 오직 은근하게 맞이하여 혹은 음식물을 후하게 주고, 혹은 뇌물을 주면서 만에 하나라도 견책(譴責)을 당할까 하여 비록 절하고 무릎 꿇는 것도 거절할 수 없게 되었으니, 폐단의 큼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성수청(星宿廳) 같은 것은 어떤 귀신이며 어떤 제사입니까? 귀신도 분명한 귀신이 아니고 제사도 올바른 제사가 아니니 이 또한 왕정(王政)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1503년 5월 1일 지평 권헌(權憲)이 아뢰기를“어제 전교에 성수청(星宿廳)에 국무(國巫)를 둔 지 유래가 이미 오래다.’ 하셨습니다. 신 등도 역시 국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무당이 요망(妖妄)하여 우매한 민심을 미혹하므로 그 죄를 다스리자는 것인데 하교에 이르기를 ‘요망한 승려 허웅(虛雄)의 예와는 다르다.’ 하시니 신들의 생각으로는 저 승려는 한 지방에 있으니 그 폐해가 몇 고을에 그치지만 지금 만일 이 무당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앞으로 온 나라가 높여 믿을 것이니 그 해가 요사한 승려보다 더할 것입니다.”하니, 조선국 10대 국왕 연조(묘호 추상)가 전교하기를 “무녀(巫女)라는 것은 모두가 요사한 술법(術法)을 사용하는데, 어찌 반드시 이 무당만 죄줄 것인가?”하였다. 헌이 다시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11월 6일 연조가 전교하기를,“정업원(淨業院) 서쪽 골짜기 북쪽 고개를 따라 소격서(昭格署)로 가는 길에 담장을 쌓아 잡인의 통행을 금하고 정업원 동쪽 언덕에서 창덕궁 옆 성수청(星宿廳) 북쪽 고개까지 모두 푯말을 세우고 사람을 금하여 올라가 바라보지 못하게 하라.”하였다.1505년 2월 22일 조선국 10대 국왕 연조(묘호 추상)가 전교하기를“성수청동(星宿廳洞) 어귀에 성을 쌓고 문을 내고 창덕궁 옆 임숭재(任崇載)의 집 북쪽에도 작은 문을 내어 서로 통할 수 있게 하라.”하였다.1506년 3월 6일 연조가 전교하기를“성수청(成宿廳)의 도무녀(都巫女)와 그에 따른 무녀에게는 잡역을 면제하라.”하였다.


중종 1년(1506) 10월 도교(道敎)의 초제(醮祭)를 관장한 소격서(昭格署)와 성수청(星宿廳)을 혁파하라는 상소로 국무(國巫)가 국가와 왕실을 위해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나라굿을 전담한 성수청(星宿廳)은 사라졌지만 왕실 내행(內行)의 별기은제(別祈恩祭)는 유생들의 반대 속에서도 조선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졌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무의(巫儀)를 좋아하여 경복궁 녹원(鹿園)에 국무(國巫)가 나라굿,병굿 등 여러 무의(巫儀)를 행하는 관월당(觀月堂)이 있었다. 국무(國巫)는 나라에서 의뢰하는 무의(巫儀)를 담당하였던 무당(巫堂)이며 조선시대에 성수청(星宿廳)·도성(都城) 내의 병인(病人)을 구호하고 치료하는 활인서(活人署) 등의 국가기관에 국무(國巫)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국무(國巫)는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조선 왕실의 축복을 기원하는 별기은제(別祈恩祭)와 기우제 및 관월당(觀月堂)의 왕후들의 무제(巫祭)를 집전하고 궁중 왕족의 병굿도 담당하였다. 국무(國巫)를 ‘나라무당’ 또는 ‘나라만신’이라 하고 그 굿을 ‘나라굿’이라고 해서 존숭하였으며 성수청(星宿廳)의 국무(國巫)는 도무녀(都巫女)와 종무녀(從巫女) 가 있었고 도무녀(都巫女)는 우두머리격의 무녀이고 종무녀(從巫女) 는 도무녀를 도와주는 무녀이며 잡역을 면제해주는 등의 특혜가 있었다. 1426년(세종 8)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관장한 사간원(司諫院)이 사대부까지도 국무(國巫)를 혹신하여 산천성황(山川城隍)을 제사지내니 성수청(星宿廳)의 국무(國巫)를 없앨 것을 청한 바 있으나 음성적으로 인정되어 왔으며 경복궁 녹원(鹿園)에 명성황후의 원당(願堂) 관월당(觀月堂)이 있었으며 무의(巫儀)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에 의해 크게 성행하였다.문화재청은 나라굿을 거행한 성수청(星宿廳)을 소격서(昭格署)와 정업원(淨業院) 사이 창덕궁 옆 임숭재(任崇載)의 집 북쪽에,관월당(觀月堂)을 경복궁 녹원(鹿園)에 원형복원하고 별기은제(別祈恩祭) 및 태묘,황단,사직,선농,선잠,문묘,영성,마사,사한,마조,장충,산천성황(山川城隍),풍운뇌우(風雲雷雨),관아(官衙)에서 신령(神靈)을 모시는 부군당(府君堂),태조 고황제와 무학대사(無學大師), 그리고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는 국사당(國師堂),단종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금성당(錦城堂), 마을을 지키는 성황신(城隍神)을 모신 성황당(城隍堂) 제례를 적극 지원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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