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 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
 김민수
 2012-10-15 19:23:24  |   조회: 2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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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 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에,“유세차 병인년(1926) 4월 신축(辛丑) 삭(朔) 20일 경신(庚申) 슬퍼하는 신(臣)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올립니다. 하늘이 상(喪)을 내리시니 상여를 붙들고 애통해 합니다. 나라에는 상례(常禮)가 있어 큰 명호(名號)를 정하여 아름다운 덕을 정했습니다만 슬픔만 더할 뿐 어찌 그 덕을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대행 황제(大行皇帝)께서는 백행(百行)이 효(孝)를 근원으로 하였으니 하나의 덕으로 이름붙이기 어렵도다. 영조(英祖)가 탄신하신 해와 똑같은 갑술년(1874)에 태어나시니 장차 대임(大任)을 내리시도다. 영고(寧考)께서 행하신 유신(維新)의 명을 받들어 순임금이 요임금을 돕듯이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태자를 세우는 명에 응하니 한(漢)나라 황제(皇帝)가 받았던 사방의 칭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잠시도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문왕(文王)이 하루 세 번 문안하던 것처럼 힘썼습니다. 만기(萬機)를 대리하게 됨에 미쳐서는 시국의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선양하는 칙지가 갑자기 내려졌습니다. 일을 잘 수행하였으며 봉양하는 정성이 더욱 깊고 장수를 축원하였습니다. 제사의 법도가 예에 맞았으니 태묘의 제사를 엄숙하게 지냈는데 음악이 그에 합당하게 연주되었습니다. 정령을 시행하는데 부지런히 하셨으며 봄철이 됨에 이르러서 친히 적전(籍田)을 경작하고 추운 겨울에 가난한 백성의 처지를 생각하시고 친히 임금께서 순행하셨습니다. 열조(列祖)가 부탁(付託)한 황업을 생각하고 한 번 백성을 보기를 다친 것처럼 하였습니다. 4년 동안 근심하시고 수고하시며 하늘에 빌어 대한제국의 운명이 영원하기를 빌었습니다. 오직 천하에 치세와 난세가 한결같지 않으니 예부터 오늘날까지 대성인(大聖人)이 상도(常道)와 권도(權道)를 때에 따라 쓰니 혹 궁(窮)하면 반드시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나라가 한가할 때에도 대월(對越)의 일심은 더욱 돈독하게 하였고, 노자(老子)가 주(周)에 숨어있어서 움직임을 보지 못하지만 백성들이 한(漢)을 생각한 것은 실로 구가(謳歌)하는 것입니다.



상기(喪期)를 잘 마쳤는데 갑자기 보령이 저물어가고 수각(壽閣)의 규정이 아직도 있는데 누차 보첩에 쓰여 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꽃피고 물고기 노니는 원림에서 7일마다 소대(召對)를 하였는데 소나무, 잣나무 우거진 숲 속에 누워계시어 억만 년 장수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하늘이 슬픔을 주시어 갑자기 붕어하실 줄을 생각했겠습니까? 주단(周壇)의 식벽(植璧)을 둘러싸니 신하들이 몹시 놀라고 형호(荊湖)에서 떨어진 활을 안으니 남은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잃었습니다. 이 넓은 천지에 애통한 마음 다 펴지 못하고 여항에서, 거리에서 오열하니 어진 은택이 백성들 마음 깊이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소자(小子)가 이 크나큰 슬픔을 당하였는데 돈독하게 베풀어 주신 우애가 마음에 가득한데 이제는 어느 곳에서 우러러 뵙습니까. 대륜(大倫)은 차서를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마지못해 이 자리에 임하여 거행하기는 하지만 모습은 뵈올 수 없고 저 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세월은 금방 흘러서 장례식 날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고조 광무제의 능 옆에 새로운 능을 조성하게 되었으니 치명(治命)의 측은함이 느껴집니다. 선왕의 능이 옮겨져서 노부(魯祔)가 거행되었으니 신리(神理)가 매우 편안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리하여 삼가 대명(大名)의 글을 얻어 일혜(壹惠)의 법도를 갖추고 문무(文武)를 본받고 온화한 덕(德)에 기본하여 진실로 밝혔습니다. 경(敬)에 거하면서 인(仁)을 구하였으며 교화를 돈독하게 하는 것에 근원하여 편안하고 고요하였습니다. 요임금, 순임금 같은 덕을 감히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형용(形容)할 수 있겠습니까? 옥책(玉冊)에 금물로 쓰니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유구한 덕에 나란히 합니다. 삼가 사신(使臣)을 보내 옥책을 받들고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효황제(孝皇帝)’라고 하고,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문온 무녕 돈인 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이라고 하고, 묘호(廟號)를, ‘순종(純宗)’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미약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아름다운 칭호에 크게 응하여 현모(顯謨)를 받들고 사서(史書)에 써서 공덕을 더욱 빛내었습니다. 선조의 공덕을 빛내고 후손에게 남겨주시어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에 면면히 복록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호라. 슬프도다. 삼가 말씀드립니다.”하였다.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이재곤(李載崑)이 제술하였다.



애책문(哀冊文)에,“유세차 병인년(1926) 3월 신미(辛未) 삭(朔) 14일 갑신에 황형(皇兄), 순종(純宗) 황제(皇帝)께서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에서 붕어하셨다. 이해 5월 경오삭(庚午朔) 초2일 신미(辛未)에 영구히 유릉(裕陵)에 옮겼으니, 예(禮)이도다. 임금의 대여(大輿)가 장차 출발하게 되니 상여꾼의 걸음이 일치되었습니다. 만 백성(百姓)이 우레처럼 통곡하니 수많은 용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는 것 같았습니다. 구중(九重) 엄숙한 궁궐을 하직하고 저 어두운 현궁(玄宮)으로 가셨습니다. 임금을 따르고 싶어도 미치지 못하니 아득히 제향(帝鄕)만 우러러 봅니다. 생각건대, 우리 순종 융희제께서는 의(義)에서는 계체(繼體)를 중히 여기시고 성심(誠心)으로는 두터운 밤에 새벽이 오는 것을 애통해하며 영신(靈辰)을 가릴 수가 없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이에 옥에 드러내어 깊고 아름다운 덕을 밝게 펴고자 합니다. 혁혁한 성조(盛朝)가 거듭 빛나서 갑년에 황태자가 되시었네. 오성(五星)에 상서로움이 모여서 제왕(帝王)의 기상이 빼어나게 드러나네. 팔도(八道)가 목을 빼고 바라보니, 진실로 우리의 황태자라네. 영고(靈考)께서 자애로우시어 몸소 가르쳐서 만물이 깨우쳤네. 일찍이 황태자의 지위를 바로하고 엄숙한 모습을 갖추었네. 어린 나이에 학문을 배우니 보고 듣는 것이 많았네. 온화하고 문아(文雅)하며 밝게 빛나니 천 년에 한 번이나 나올 분이었네. 태실(太室)에서 대신 강신제(降神祭)를 지냈으며 색동옷입고 부모님을 즐겁게 하였네. 금물를 쓴 옥책(玉冊)에서 공덕을 드러냈네. 백성의 칭송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도모하지 않아도 다시 일어나네. 덕을 기르는 것이 오래되니 중외에서 미덥게 여겼네. 선양을 굳게 사양하며 두세 번 울며 호소하였네. 백성의 찬양이 모이니 마지못해 대업(大業)을 이었네. 신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정일(精一)한 도를 지켰네. 크게 어려운 시기이니 그 때가 정미년(1907)이였네. 부지런히 정무를 보시며 마음이 편할 겨를이 없었네. 포용력을 베푸니 신료가 조정에 가득 하네. 팔짱끼고 남면하며 대도(大道)를 힘써 따랐네. 시끄러운 소리와 화려한 색을 눈과 귀에 가까이 하지 않았네. 백성들이 소생하기를 자신이 아픈 것처럼 여겼네. 현인(賢人)을 높이고 허물을 용서해주었으며 윤음(綸音)을 밝게 선포하였네. 친잠(親蠶)과 친경(親耕)은 선왕과 비견되게 보이네. 혹한도 꺼리지 않고 지방을 순방하며 돌아다녔네. 남쪽으로는 동래(東萊)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의주에 이르렀네. 천자의 수레를 멈추고는 백성의 사정을 묻고 덕음을 반포하였네. 사녀(士女)들이 만세를 부르고 흔쾌히 용안을 우러렀네. 지극한 덕이 탕탕(蕩蕩)하고, 기수(氣數)가 망망(茫茫)하네. 공경하고 한가하니 어진 소문이 오히려 드러났네. 진진(振振)하여 속적하니 은혜가 비상하였네. 덕이 시신(侍臣)에게 미치고 옛 신하들도 잊지 않았네.



을미년(1895)의 애통한 일에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마음을 품은 지 30년에 하늘이 뉘우치지 않았고 태황(太皇)이 돌아가시니 여막에서 깊은 슬픔에 잠기니 전후가 일치하네. 궁중에 걸어놓은 어진을 휘장으로 가리고 차마 보지 못하네. 영정에 임하는 것에도 살아계신 분 섬기는 도리로 하여 날마다 일어나는 일상의 일들을 반드시 세세하게 보고하였네. 능에 뵙고 하직할 때에는 경건하게 말로 고하니 천자로서 증자, 민자건 같은 효성이 진실로 여기에 있네. 옛날 서루(西樓)를 영수각이라 부르고 네 명의 임금께서 글을 쓰셨는데 후손이 실천하셨네. 지팡이 짚은 머리 희끗한 노인들에게 좌우에서 술잔을 올리네. 이미 계술하고 오래 사시기를 기원하였네. 그런데 어찌하여 병이 드시어 갑자기 하늘이 재앙을 알리는가. 어지러이 동모(同瑁)에서 당황하고 아니 돌아가셨네. 오호라. 슬프도다. 임금은 이미 돌아가시고 그 곳에 휘장으로 둘러있네. 인생은 이슬같고 보의(黼扆)에는 먼지만이 쌓이네. 옥 같은 말씀은 어제런듯하고 면류관(冕旒冠) 쓰신 모습은 어디서 뵙겠는가. 슬프고 애절함만 첩첩 쌓이고 하늘에 불러도 그 모습 찾을 수 없네. 오호라. 슬프도다. 머무실 곳 찾으니 홍릉(洪陵) 가까운 곳이었네. 길지(吉地)로 판명되었으니 신리(神理)에 의지하여 유명(幽明) 간에 알았으니 아마도 문안을 빠뜨리지 않고 살아 생전의 효도를 실천하시니 엄숙하게 옥란(玉欄)에서 함께 즐기시리. 오호라. 슬프도다. 동루(銅漏)가 새벽을 재촉하고 붉은 기가 바람에 흔들리니 제기(祭器)를 거두고 장지로 떠나심을 고하네. 화려한 도성을 뒤로 하고 동쪽으로 향하니, 대여(大輿)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시냇물도 느릿느릿 흐르네. 의장(儀仗)은 쓸쓸한 기색을 띠고 아득한 신유(神遊)를 어찌 따르리오. 오호라. 슬프도다. 물도 굽이 돌고 구름도 막히며 만상(萬象)이 차고 이지러지면 수명의 장단(長短)을 헤아리면 실로 고금이 같다네. 90수명을 꿈꾸어도 징험(徵驗)할 수 없고 세상의 괴로움을 다스려주니 누구를 탓하리오. 그러나 성한 덕(德)이 두루 미쳤으니 백서의 마음에서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덕을 보잘것없는 말로 쓰지만 영원히 남겨지리라. 오호라. 슬프도다.”하였다.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민영휘(閔泳徽)가 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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