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 지문(誌文) 행장(行狀)
 김민수
 2012-10-15 18:11:08  |   조회: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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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 지문(誌文) 행장(行狀)





지문(誌文)에,“아, 공경하는 우리 순종(純宗) 황제(皇帝)는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척(坧)이다. 자(字)는 군방(君邦)이요 호(號)는 정헌(正軒)이다. 고조 광무제의 적사(適嗣)이며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의 손자(孫子)이다. 어머니는 영의정(領議政)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순간공(純簡公)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이신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이다. 갑술년(1874) 2월 8일 신사(辛巳) 묘시(卯時)에 제(帝)가 창덕궁(昌德宮) 관물헌(觀物軒)에서 탄강하셨으니 실로 고조 광무제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11년이 되던 해였다. 이보다 앞서서 궁인들이 영변군(寧邊郡)에 있는 묘향산(妙香山)과 연안(延安)에 있는 남대지(南大池)에 경건하게 기원을 드렸다. 여러 차례 기이한 길조가 있었는데, 머지않아 홍저(虹渚)의 경사가 있었다. 다음해 을해년(1875)에 조선국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제(帝)는 제왕의 표상이 있었고 영웅 위걸의 모습이 준수하고 정연하였다. 이때에 청국 사신이 와서 절하고 우러러 보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狠)하게 체구가 크고 한(狠)하게 뛰어나다.’ 이 말은 청(淸)나라의 방언인데 상등(上等)의 용모를 보고 칭찬한 것이다. 대개 체구가 크면 살이 수려하기 어렵고 수려하면 체구가 크기 어려운데, 이미 체구가 크면서도 살이 수려하니 범상(凡常)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는 어려서부터 지성(至性)이 있어서 태황제가 봉선(奉先)과 사친(事親)에 성효(誠孝)를 능히 다하자 제(帝)는 몸소 실천하는 교화(敎化)에 함육되어 모든 행동거지가 이미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君子) 같았다. 도(道)에 가까운 자질과 천성에 타고난 효(孝)를 행했다. 또한 가정 안의 일상적인 행동에 익숙하였는데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는 의방(義方)의 가르침에서 돈독하게 아낀다고 해서 가르침을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이에 덕을 기른 세자로서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임오년(1882)에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드디어 관례(冠禮)를 행하고 이내 순명황후(純明皇后)와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후(后)는 추증된 영의정(領議政) 여은 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따님이시다. 명문에서 생장하여 부인의 법도를 모두 갖추었는데 제가 정도(正道)로서 가지런히 하였으며 화합하되 시속에 휩쓸리지 않았다. 뜻을 다해 양전(兩殿)을 봉양(奉養)하였다. 양전은 이를 합당하게 여기고 기뻐하였다. 당시에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의 장수하시고 강녕하시니 궁궐에 3대가 살면서 기뻐하고 흡족해하였다. 덩달아서 풍년(豐年)이 들었고 백성(百姓)은 풍족하며 팔도(八道)가 또한 편안해졌다.



무자년(1888)에 제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정청(庭請)하였으며, 경인년(1890)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임진년(1892)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갑오년(1894)에 이르러 나라에 큰 일이 많이 벌어져서 시국이 크게 바뀌었다. 고조 광무제는 광운(廣運)을 크게 헤아리고 치제(治制)를 고쳤다. 임금의 명준한 계책을 여러 신하들이 혹 미치지 못했으나 오직 제만은 은밀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을미년(1895)에 일본 군경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붕어하셨다. 제는 참혹한 화란에 해통해 하시며 지극한 한(恨)을 품은 채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조 광무제께 근심을 끼칠 까 두려워서 힘써 억제하고 얼굴색을 부드럽게 하였다. 그러나 한가하게 홀로 있는 곳에서는 홀연히 즐거운 뜻이 없었다. 정유년(1897)에 고조 광무제의 성덕(盛德)이 날로 융성해져 백관과 백성들이 황제에 오르기를 청하니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시고 제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경자년(1900)와 임인년(1902)에 계속해서 고조 광무제에게 휘호를 올렸다. 갑진년(1904)에 순명황후(純明皇后)가 붕어하셨다. 병오년(1906)에 순정황후와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후(后)는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해풍 부원군(海豐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따님이신데 어려서부터 가훈(家訓)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아름다운 덕을 닦아서 사녀(士女)의 행동거지에 6궁(宮)이 칭송하였다. 정미년(1907)에 고조 광무제의 명(命)으로 내선(內禪)을 받았는데 고사(固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려운 대업(大業)에 나가서 무겁게 부여 받은 임무를 물려받아 만기(萬機)를 총괄하고 온갖 법도(法度)를 다스렸다. 중요한 일은 고조 광무제에게 아뢰어 재가(裁可)를 받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정부에 위임하여 결정하게 하니 사해(四海)가 무위(無爲)의 정치를 우러러보았다. 무신년(1908)에 남쪽 지방을 순수(巡狩)하고 강토를 시찰하고 풍토(風土)를 변별(辨別)하였으며 민생(民生)의 고통을 물어보았으며 농사의 고충을 살폈다. 열흘이 못되어 나라 끝까지 갔다가 돌아와 의장 행렬이 성대하게 거행되니 환호하니 덕화(德化)의 밝은 아름다움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몇 달후 서쪽을 순수(巡狩)하여 용만(龍灣)에 이르니 또한 남순(南巡)을 했을 때와 같았다. 이는 전 성조(聖朝)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성대한 일이었다. 경술년(1910)에 이르러 천운(天運)이 또 한 번 변하였으니, 제는 단지 태묘(太廟)를 높이고 생령(生靈)을 긍휼히 여겼지만 남면(南面)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래에서 존경하고 추대하는 것이 더욱 깊어졌다. 정사(丁巳)에 친히 북도(北道)에 행행하며 여러 능(陵)에 나가 전알(展謁)하였다. 행차가 출발하자 비가 왔는데 북도의 백성들은 다투어 살고 있는 집의 띠와 울타리의 나무를 뽑아서 진흙길을 포장하여 승여(乘輿)가 다니는 것을 편히하였다. 기뻐하면서 서로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오셨다.’라고 하였다. 함흥(咸興)에 행차하였을 때 몸소 전침(殿寢)에 배향하고 신사(紳士)를 위로했으며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종성(宗姓)에게 돈독히 하였다. 북도의 선비들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옛날에 한 번 놀고 한 번 즐거워함이 제후(諸侯)의 법도라고 한 것이 이제 우리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오년(1918)에 고조 광무제가 경운궁에서 붕어(崩御)하셨다.



제는 을사년(1905), 경술년(1910) 이후 한결같이 애태우며 오직 고조 광무제만을 봉양(奉養)하며 날을 아까워하는 정성으로 흔연히 천하(天下)를 잊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 끝까지 미치는 애통한 일을 만났는데 슬픈 마음으로 이르지 못하고 원통하게 울부짖었다. 애훼가 상도에서 지나쳤다. 이때에 제도가 새 법도와 옛날의 법도가 달랐는데 제가 심신(心神)을 수고롭게 하면서 종척(宗戚)의 원로들과 더불어 신종(愼終)의 예(禮)를 의논하고 반드시 옛날 법식을 썼으니 비로소 마음에 유쾌함이 있었다. 변두(籩豆)의 숫자, 축고(祝告)의 문투, 의장(儀仗)과 상설(象設)의 갖춤에 이르기까지 기일 이전에 갖추어 순서를 따라 행하니 유사(有司)와 집사(執事)는 오직 명을 따를 뿐이었다. 3년 동안 여막에서 지냈고 크고 작은 제사를 막론하고 직접 제사를 지냈다. 고조 광무제가 일찍이 즐겨 드시던 것은 매번 상식(上食)을 올릴 때 반드시 별도로 바쳤다. 상복을 벗고도 오히려 근심하는 것은 거상(居喪) 때와 같았다. 갑자년(1924)에 보령(寶齡)이 51세가 되니, 영수 각첩(靈壽閣帖)에 시(詩)를 직접 쓰고 기사(耆社)에 있는 여러 신하를 불러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이것 또한 고조 광무제가 임인년(1902)에 성대한 일을 치른 것을 따른 것이었다. 열성(列聖) 이래 겨우 5번의 경사가 있었다. 이러므로 백성들은 백세(百歲)를 누리기를 서로 간절하게 기원하고 축하하였다. 우연히 근년에 족부에 통증이 자주 일어났다가 얼마 후에 낫기도 하였다. 병인년(1926) 봄에 침수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점차 창비(脹痞)가 생겼다. 마침내 3월 14일 묘시(卯時)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붕어하셨으니 보령이 53세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5월 2일 홍릉(洪陵)의 왼쪽 강(岡) 묘방(卯方)언덕에 장례(葬禮)를 지낼 것이다. 4월 25일 먼저 순명황후의 시신을 유릉(裕陵)으로 옮겨 합부지(合祔地)로 하였으니 병이 드시기 전에 내린 명령에 따른 것이다. 종척의 원로들이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문온 무녕 돈인 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이라고 하고, 묘호(廟號)는 ‘순종(純宗)’이라고 하였다. 종척의 기구(耆舊) 및 유사, 집사들에게 하교하기를, ‘무오년(1918)에 고조 광무제의 상에 대행 황제가 우리나라의 구례(舊禮)를 써서 성효(誠孝)를 다하였으니, 이제 대행 황제의 상에는 마땅히 따라서 하고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가 바쁘게 달려가 직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윤용구(尹用求)에게 하교하여 말하기를, ‘군(君)은 왕실(王室)의 가까운 인척으로 가까이 출입(出入)하여 70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되었으니 이번의 이 유궁(幽宮)의 지(誌)는 군이 찬하라.’라고 하였다. 윤용구는 특별한 은혜를 입은 데 감격해서 감히 노병(老病) 때문에 사양한다는 말을 못하였다. 삼가 대행 황제의 호(號)에 연술(演述)하였다.



아, 슬프도다. 우리 고조 광무제가 칙서(詔勅書)를 내려, 짐(朕)과 동궁(東宮)은 유교(儒敎)를 종통(宗統)으로 천하(天下)에 밝게 선포한다고 하였다. 제는 집안에서 선조의 법도를 익혀서 성인(聖人)을 본받으며 도(道)를 지키고 현인(賢人)을 높이고 인재(人材)를 아꼈다. 총명하게 잘 기억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니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와 백가(百家)의 보계(譜系), 정주(政注)의 격식(格式)과 진신(搢紳)의 이력(履歷) 등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더욱 전례에 익숙하며 예서(禮書)에 기재되지 않은 것은 끝까지 몸소 행하지 않았다. 이는 성인의 문(文)이었다. 의젓한 위엄이 밖에 드러나고 온화한 순수(純粹)가 마음에 쌓이고 평소에 빠른 말과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접하는데 나태한 얼굴을 짓지 않으며 그 사람이 과오가 있어도 바로 위벌(威罰)을 가하지 않고 깨우쳐주어 스스로 바꾸도록 하였다. 향곡(鄕曲)의 문관(文官)이 시종(侍從)으로 등용될 때 반드시 그 고을의 일을 상세히 물어보았다. 무릇 여러 신하(臣下)를 대할 때 반드시 그가 맡은 일과 잘하는 일을 따라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므로 아뢰는 일이 서로 어그러지며 막히는 뜻이 없었으며 그 상주(上奏)하는 바에서 진심을 다 표현하였다. 혹은 주대(奏對)에서 임금의 뜻과 맞지 않는 말을 하면 반드시 다른 말을 끌어와서 그 말을 그치게 하여 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의 단점(短點)을 거론하지 않으며 사람이 간혹 서로 알력이 생겼을 때는 또한 서로 화해시켜서 화평(和平)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온화(溫和)이다. 스스로 엄정한 몸가짐을 갖추니 화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움직이면 반드시 믿음성있게 하니 명령(命令)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졌다. 날마다 신문사보(新聞社報)를 접하고 이웃 나라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면 어려움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여자가 그 행실을 잃어버린다든지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올라타고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하는 것에 징치(懲治)할 바를 생각하였다. 홍릉(洪陵)에 감수(監守)하는 자가 능에 있는 나무의 윗가지를 잘라냈다는 말을 듣고 저녁 상을 물리치고 음식을 먹지 못하니, 이로부터 감수하는 자는 자르는 것을 이 사실을 알고 그 행동을 그만두었다. 부지런히 일한 노궁녀(老宮女)가 우연히 선조(先朝) 때의 국사(國事)에 대해 말하였는데, 즉시 엄하게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감히 선조(先朝)의 일을 말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이로부터 궁인배(宮人輩)들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무(武)였다. 항상 양궁(兩宮)의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스스로 몸을 보호하여 잠자고 음식을 먹을 때 위생(衛生)에 장애가 있으면 일절 경계하고 신중하였다. 대단히 춥고 아주 더울 때 여항의 백성들이 어떻게 잘 살고 있는가를 생각했으며 매우 건조하고 음산한 장마 때는 전가(田家)가 어떻게 생업을 잘 영위하는지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영(寧)이었다. 두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누이가 있어서 근심과 기쁨을 같이 하였다. 영친왕이 유학하고 나서 돌아와 뵈니 단란하게 기쁘게 지내니 신하들이 감동을 받았다. 제사와 배향을 드릴 때 의친왕(義親王)이 아헌(亞獻)으로 들어오자 기쁜 기색으로 행례(行禮)의 자리를 반드시 바로잡도록 명령하였다. 덕혜옹주(德惠翁主)도 지극히 어루만지고 사랑해주었는데,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받드시 나누어주었다. 가까운 종척(宗戚)이 가세(家勢)가 기울게 되면 월름(月廩)을 지급하여 생활을 온전하게 해 주었으며, 선조에서 벼슬을 맡은 사람은 비록 지체가 낮더라도 반드시 우대(優待)하고 후하게 베풀었다. 이것이 성인의 돈독함이었다. 관리로서 근무하는 사람은 작은 허물이 있다고 해서 쫓아내지 않았으며 부득이하게 쫓아내더라도 반드시 재물을 내려주어 봉록(俸祿)을 대신하게 하였다. 잘못을 숨겨주고 허물을 감춰주어 대화합(大和合)을 보합하여 기상(禨祥)을 인도하여 맞이하였다. 세신(世臣)의 부음(訃音)에는 근심하는 기색을 보였으며, 백성이 굶어죽으면 임금 자신이 상처받은 것처럼 하였다. 무고한 백성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세세한 것에도 생각이 미쳤으니, 이것이 성인의 인(仁)이었다. 고조 광무제는 경운궁에 계셨는데 3시에 일어나서 반드시 전화(電話)로 고하였다. 태묘(太廟)에 향사(亨祀)할 때도 크게 아프지 않으면 섭행(攝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있어 고할 때는, 분각(分刻)도 어긋나지 않았으며 한가지 일에도 마음을 속이지 않았으며, 한마디 말에도 다른 사람을 없이 여기지 않았다. 오직 실천과 내실에 힘썼으니 이것이 성인의 정성(精誠)이었다. 한가하게 있을 때도 일찍이 하늘을 쳐다보며 누워있지 않았다. 정당(正堂)에 고조 광무제의 어진(御眞)을 걸어놓고 휘장으로 가려놓아 그 아래에서 자세를 어긋나게 하지 않았다. 매번 능(陵)에 오를 때는 비록 비가 쏟아져도 지름길로 돌아서 재전에 가지 않았다. 북쪽에 순행할 때는 문천(文川)을 지나 숙릉(淑陵)의 산기슭이 시야에 들어오자 즉시 의자(椅子)에서 일어서서 두 손을 마주잡았으며 지나간 후에 비로소 앉았다. 묘전(廟殿)에 봉심(奉審)하고 들어가 품(稟)할 때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명을 받았다. 묘전에 들어가 더욱 공경하고 엄숙하여 관직이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혹 순서에 어긋나서 의절에 어긋나게 하면 반드시 친히 명령을 내려 고쳐서 의절(儀節)에 맞게 하였다. 옛날에 도덕(道德)과 공훈(功勳)을 세운 업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 자세히 살폈고 근실하고 경계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경(敬)이었다. 재백(財帛)과 성색(聲色)에 대해 담백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일정한 법식과 기관을 마음 속에 두지 않았다. 외설적인 장난과 속된 풍속에 대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성학(聖學)을 배우지 않고도 천성적으로 그러한 것이었으니 이는 성인의 순수(純粹)였다. 사단(四端)의 싹과 만선(萬善)의 일어난 것이 모두 성효(誠孝)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어렸을 때 양궁이 병이 있어서 안색에 근심스런 빛이 드러나니 음식도 줄이고 잠도 자지 않았는데 병이 나은 연후에 처음으로 돌아갔다. 비록 심상한 음식물이라도 반드시 먼저 바친 후에 자신이 먹었다. 북원(北苑)에 곡식을 심어 막 익었을 때 가까운 신하를 거느리고 북원에 나가 베어 수확하였다. 가까운 신하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주기를 바랬는데, 이미 덕수궁에 바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중(喪中)에 기거하는 뜰 앞에 꽃이 만개하니, 이를 장막을 쳐서 가렸다. 비슷한 일들은 가히 다 서술할 수 없다. 이것이 대성인의 효성이었다. 대행(大行)에 대명(大名)은 예(禮)에서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 십자(十字)로 드러낸들 어찌 실제 일의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형용할 수 있겠는가. 오호라. 슬프도다. 제의 아름다운 행실과 순수한 덕은 고조 광무제를 따른 것이니 깊은 인(仁)과 두터운 혜택은 신민(臣民)들에게 젖어들었다. 신민에게 무오년(1918)의 애통함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는데, 또다시 오늘에 망극(罔極)한 애통함을 만나니 도성의 사녀가 궐문(闕門)에 다투어 달려가 부모를 잃은 듯이 부르짖으며 애통해 하였다.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도 외딴 촌락과 궁벽한 골목에서 모두 상복을 입고 천리(千里)를 달려와서 곡(哭)을 하니, 외국 사람들도 보고 감탄하였다. 요(堯)임금이 죽고 순(舜)임금이 제 위에 오를 때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아, 슬프도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피눈물을 닦으며 글을 올립니다.”하였다.전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윤용구(尹用求)가 찬(撰)하였다.


행장(行狀)에,“아, 슬프도다. 우리 대행 황제(大行皇帝)께서 병인년(1926) 3월 14일 묘시(卯時)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붕어하셨습니다. 다음달 상순(上旬)에 원로 재신(宰臣)과 종척(宗戚)을 불러들여 의논하여 묘호(廟號)를 ‘순종(純宗)’, 제호(帝號)는 ‘효황제(孝皇帝)’, 시호(諡號)는 ‘문온 무녕 돈인 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라고 올렸습니다. 신(臣) 윤덕영(尹德榮)이 탁룡(濯龍)의 자취에 의탁하고 특별히 지우(知遇)를 입었기 때문에 대행 황제의 덕을 묘사하는 행장을 찬하라고 명하였으나 저의 재주가 모자라고 또한 애통하여 문장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리상 감히 고사할 수 없어 울음을 삼키고 눈물을 닦으며 말씀을 올립니다.황제(皇帝)의 성(姓)은 이씨(李氏)고, 휘(諱)는 척(坧)이며, 자(字)는 군방(君邦)이고 호(號)는 정헌(正軒)이니 고조 광무제가 지은 것이다. 제(帝)는 고조 광무제의 적사(適嗣)이며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의 손자(孫子)이다. 고조 광무제제는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의 아들인데 문조(文祖)를 계승하여 대통(大統)을 하였으니 헌의왕(獻懿王)은 제에게 본래 친할아버지였다. 어머니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이니, 영의정(領議政)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이며 순간공(純簡公)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이시다. 갑술년(1874) 2월 8일 신사(辛巳)일 묘시(卯時)에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에서 탄강하셨는데 실로 고조 광무제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11년이 되던 해였다. 이보다 먼저 왕세자에 책봉되지 아니한 임금의 맏아들 원자(元子)가 태어났으나 일찍 조졸(早卒)하시니 나이 든 궁인들이 근심되어 영변(寧邊)에 있는 묘향산(妙香山)과 연안(延安)에 있는 남대지(南大池)에서 두루 기원을 드렸다. 기원을 드리는 곳마다 모두 기이한 길조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징험되었다. 제는 천성이 빼어나고, 성스러운 자질을 가졌다. 영특함에, 순수함에 태황제가 아껴주고 또한 중히 여겼다. 일찍부터 가르칠 것을 생각하여 치사(致仕)한 이돈우(李敦宇), 재보(宰輔) 송근수(宋近洙)를 보양관(輔養官)으로 임명하였으며, 명망있는 공경(公卿)을 가려 민영목(閔泳穆), 유현(儒賢)인 임헌회(任憲晦)를 유선(諭善)으로 삼았다. 다음해 을해년(1875)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인재를 골라 궁관(宮官)으로 임명했는데, 한 시대의 인재를 잘 가려서 백관(百官)들 중에서 가장 잘 예우하였다. 제는 어릴 때부터 빼어나다는 칭송이 날로 안팎으로 전파되어 청(淸)의 사신이 와서 알현(謁見)할 때에 그 뛰어난 자태를 뵙고 크게 경탄하기를, ‘매우 풍채도 좋고 매우 준수하다.’라고 하였다. 대개 풍채가 좋으면 준수하기 어렵고 준수하면 풍채가 좋기가 어려운데 풍채가 좋으면서도 준수하니 이는 보통사람보다 훌륭한 용모인 것이다. 한(狠)하다는 것은 심하다는 뜻을 가진 청 나라의 방언이었다. 3, 4세에 이르러 이미 효(孝)가 인도(人道)의 가장 큰 근본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날마다 고조 광무제를 뵈옵고 자전(慈殿)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태묘(太廟)를 정성으로 받들었는데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말과 행동 섬김과 행위 하나하나를 조금도 마음대로 행하지 않았다. 고조 광무제가 바른 도리를 몸으로 보여주셨으며 돈독하게 아낀다고 해서 가르침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제의 천품(天品)은 본래 도(道)에 가까웠는데 정훈(庭訓)이 이와 같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성인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임오년(1882)에 황제가 9세가 되었을 때, 아름다운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고조 광무제께서 성균관(成均館) 문선왕묘(文宣王廟)에 순종 융희제를 거느리고 나아가 성인을 배알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고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반교(泮橋)의 문(門)에 둘러서서 성대한 의식(儀式)을 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사람이 수만 명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어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덕기(德器)가 노성한 것 같았다. 얼마후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가 기이(期頤)의 팔순의 나이에 올라 강녕(康寧)의 복(福)을 누리고 계시므로 고조 광무제는 기뻐하며 뜻을 받들어 해마다 풍정(豐呈)을 올렸다. 한 궁궐에 3대가 같이 있어서 경사가 날로 이르니 백성들이 태평성대에 들었다.



무자년(1888)에 제가 여러 신료들을 거느리고 소청하니 삼전(三殿)의 휘호를 가상하였고, 경인년(1890)에 또한 가상하였으니 무자년(1888)의 의례와 같이 하였다. 이 해에 익황후(翼皇后)가 돌아가셔서 고조 광무제는 천성에서 나온 효를 지극히 하고 거동에 가법(家法)을 따르고 장사와 제사의 의절(儀節)을 반드시 마음에 지극히 하였다. 그러나 애통한 가운데서 혹 미비한 점이 있다면, 제가 문득 대신 수고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때 제는 나이가 아직 약관이 되지 않았지만 절문(節文)에 익숙함이 이와 같았다. 임진년(1892)에 또한 양전에 존호를 올렸다. 양전은 상복을 벗은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제가 여러 차례 소(疏)를 올려 굳이 힘써 청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았다. 갑오년(1894)때까지 팔도(八道)가 승평(昇平)한 시기가 오래되니 사방의 이웃이 날로 수교를 도모하였다. 이에 이르러 풍운(風雲)이 날로 변하여 화란의 조짐이 틈을 타고 일어나며 열강(列强)이 밖에서 틈을 엿보고 비도(匪徒)가 안에서 선동하였다. 고조 광무제는 그것을 진정시킬 것을 도모하여 확고하게 결단을 내려서 온갖 제도를 경장(更張)하였으며 신진 인사와 재주가 뛰어난 신하를 많이 등용하였다. 이는 아직 성지(聖智)에 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오직 제만이 비밀리에 도와준 일이 많았다. 을미년(1895) 8월 궁위(宮闈)의 계엄(戒嚴)이 소홀하여 일본 군경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붕어하셨다. 제는 갑자기 참혹한 재화(災禍)를 만났는데 지극한 한(恨)을 풀 길이 없었고 온 천지에 돌아갈 바가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부황(父皇)의 마음을 이해하여 괴롭고 비통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항상 부황의 근심을 위로해 드렸다. 그러나 한가하게 조용히 있을 때에는 매번 말과 웃음으로 즐기지 아니하였다. 오직 공손히 제사에 정성을 다하기를 태황제가 익황후(翼皇后)의 상을 치를 때처럼 하였다. 정유년(1897)에 고조 광무제의 위덕(威德)이 날로 성하여 만백성(萬百姓)이 추대하고 열국이 감복하니 원보(元輔) 심순택(沈舜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호(大號), 즉 황제위(皇帝位)에 오르기를 청하여 대한제국 황제에 등극하시고 제는 황태자가 되었다. 천하(天下)에 대사면(大赦免)이 있었으며 중흥(中興)의 업(業)을 넓히고 만세에 큰 기반을 세우시니 유성(維城)의 굳셈과 계조(繼照)의 밝음이 전보다 더욱 융성(隆盛)하였다. 이어 경자년와 임인년(1902)에 계속해서 존호를 올려 공덕을 드러냈다. 임인년에 고조 광무제의 보령이 51세가 되니, 영조(英祖)의 고사(故事)를 따라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사첩(社帖)에 제명(題名)을 붙이고 기신(耆臣)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때에 삼상신(三相臣)은 심순택, 조병세(趙秉世), 윤용선(尹容善)이었는데, 모두 기사(耆社)에 이미 들어갔다. 고조 광무제는 기이한 일로 여겨 궤장(几杖) 및 시(詩)를 내려 축하하였다. 제도 또한 시를 지어 주니 일시의 지극한 영화였다. 갑진년(1904)에 순명황후(純明皇后)가 붕어하시고 병오년(1906)에 상을 마친 후에 순정황후를 맞이하여 황후의 지위를 바르게 하였다. 다음해 정미년(1907)에 고조 광무제의 춘추가 높아지고 황태자의 명망이 점점 드러나니 비로소 대리청정(代理聽政) 명령을 내렸다. 제는 놀라고 두려워 진실로 사양했으나 한정(漢庭)의 우익(羽翼)이 이루어지고 하민(夏民)이 노래로 찬양하며 귀의하듯이 하니 하늘의 명에 응하고 사람의 여론을 부득이 따라서 조종(祖宗)이 맡겨주신 무거운 책무를 받들었지만 시사(時事)가 지극히 어려움을 만났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일 구분하지 않고, 위로는 대조(大朝)의 품재(稟裁)를 받고 아래로는 내각(內閣)에 위임하고서 팔짱을 끼고 앉아서 다스리니 온갖 일이 모두 이루어졌다. 제는 국조(國朝)의 단서(丹書)와 고적(錮籍)에 깊은 원망이 섞여 있음을 깊이 염려하고 모두 죄를 씻어줄 것을 명하여 당화(黨禍)를 없애게 하였다. 그리하여 먼 지방으로 유배를 간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어 화기(和氣)를 이끌었다. 측은해 하는 칙서(勅書)를 널리 반포하여 깨우쳐서 오래 젖어든 습속을 새롭게 하도록 일깨우고 산업을 일으켜 생을 즐겁게 하기를 권유하니, 백성(百姓)이 모두 잠시나마 죽지 않으려는 소원을 갖게 되었으며 밝은 덕화(德化)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무신년(1908)에 문학 유신(文學儒臣) 김윤식(金允植), 이용원(李容元) 등에게 명하여 헌종(憲宗), 철종(哲宗) 양조(兩朝)의 보감(寶鑑)을 찬수(纂修)하게 하였다. 또한 삼종(三宗)을 아직 추존(追尊)하지 못한 것을 법도에 흠이라고 여겨서 의식을 거행하여 진종(眞宗)을 높여 ‘소황제(昭皇帝)’라고 하고 헌종(憲宗)을 ‘성황제(成皇帝)’, 철종(哲宗)을 ‘장황제(章皇帝)’라고 하였다. 이 해 겨울에 남도(南道)를 순수(巡狩)하여 부산(釜山)에 이르렀고 보름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또한 서방(西方)에 순력(巡歷)하여 의주(義州)에 이르니 모두 수십일 안에 2,000리의 먼 거리를 돌아다녔다. 강역의 연혁(沿革)과 토속(土俗)의 장단을 변별(辨別)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민생(民生)의 질고(疾苦)와 농사의 고통도 또한 살피지 않음이 없었다. 조사(朝士)들이 알현(謁見)에 참여하면, 오랫동안 소식이 막혀서 만나기를 원했다는 뜻으로 위로했으며, 유림(儒林)이 공경스럽게 맞으면, 학업(學業)을 부지런히 닦기를 권면하였다. 행차가 지나가는 곳에도 안의 유현(儒賢), 명상(名相), 충의(忠義), 공열(功烈)의 가묘(家廟)와 묘소(墓所)를 살펴보고 관리(官吏)를 보내 제를 베풀어주었다. 이때 누추한 집에서 어렵게 살면서 독서하는 선비들과 여항(閭巷)의 신분이 낮고 보잘것없는사내 필부(匹夫)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기술과 재능이 있는 사람을 흥기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남녀 노소가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절을 하고 도로에 늘어섰으며 벽지에서도 기뻐하며 환호하였으니 이는 옛날 성왕(聖王)의 시대에도 없었던 성대한 거조였다. 경술년(1910)에 이르기까지 시사가 또한 크게 변하여 제는 하늘의 명에 순종하는 것이 천하를 보존하는 뜻이라고 생각하여 윤음을 내렸다. 그리고 오직 만기(萬幾)의 번다한 업무에서 벗어나 오직 태묘를 받들어 생령(生靈)을 편하게 하는 것만을 생각하니, 아래에서 존경하고 추대하는 바가 더욱 깊어졌다. 정사년(1917) 봄에 북도(北道) 팔릉(八陵)에 나아가 알현했는데 수레는 이미 출발하였는데 큰 비가 내리리, 북도의 백성들은 다투어 지붕이 있는 띠와 울타리에 꽂힌 나무를 뽑아다가 진흙길에 깔고 승여(乘輿)를 인도하고 기뻐하면서 서로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오시는데, 어찌 아끼겠는가? 비록 풍찬노숙(風餐路宿)을 겪더라도 유감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인정(人情)을 크게 가히 볼 수 있었다. 함흥(咸興)에 머물러 친히 본궁(本宮)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며, 사관(祠官)을 나누어 보내어 각군(各郡)의 능침(陵寢)에 제사를 드렸다. 준원전(濬源殿)의 제사를 끝내고 나서 신사(紳士), 부로(父老)의 어가를 맞은 사람들을 모아 노고를 위로하였다. 또한 선파인(璿派人)을 모아 별도로 연회(燕會)를 베풀어 돈독하게 하였다. 사왕(四王) 별자(別子)와 공주의 가묘(家廟)에 제수(祭需)를 후히 내렸다. 북도의 선비들이 서로 말하기를, ‘옛날에 한 번 유람하고 한 번 즐거워함이 제후(諸侯)의 법도가 되었는데, 지금 우리 임금에게서 이를 보고 있다.’라고 하였다. 돌아올 때에 이르러 태조 황제(太祖皇帝)의 이모인 최씨(崔氏) 및 그 지아비인 석씨(石氏)의 묘가 함경남도 남부 정평군(定平郡)의 외딴 곳에 있었는데, 사자(使者)를 보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승려는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또한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였다. 이 모두는 좌우(左右)에서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나 제가 이미 소상하게 헤어려 정성을 다해 시행하였다. 겨울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화재의 재앙이 있어서 선정전(宣政殿)의 동쪽 전부가 잿더미가 되자 재빨리 중건(重建)의 역사(役事)를 시행하였다.



무오년(1918) 여름 고조 광무제가 날마다 분부하여 말하기를, ‘옛날 순묘조(純廟朝)에 대조전의 화재 이후에 종기의 질환이 계속되다가 필경 붕어에 이르게 되었다. 조손(祖孫)의 사이는 소목(昭穆)과도 같은데 이제 화재 및 종기의 질환이 서로 부합되어 맞으니 내 병도 장차 일어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제는 아침 저녁으로 탕제를 달여 드리고 친히 부축을 하며 애태우니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켜서 가을 후에 병을 낫는 경사가 있었으니 모두 성효(聖孝)가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칭송하였다. 이로부터 고조 광무제의 종증(腫症)이 차도가 있었으나 원기가 오래도록 상해서 임금의 기후가 정양(靜養)을 크게 필요로 하였다. 순종 융희제가 이 때 창덕궁에 있었는데 걱정으로 날을 보내면서 항상 옆에서 모시지 못함을 한으로 여겼다. 12월에 이르러 고조 광무제가 경운궁에서 붕어(崩御)하셨다. 전날 저녁에 풍환(風患)이 갑자기 일어나 병의 증세가 급해지자 황제가 이를 듣고 즉시 달려가서 탕제를 올렸으나 잠시 때를 놓쳐서 이미 미치지 못하였다. 순종 융희제는 을미년(1895) 이래 세상에 대한 즐거움이 없고 오직 고조 광무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을 운명으로 여겼다. 정미년(1907)에 이르러 각기 다른 궁으로 나뉘어졌으나 수레로 친히 찾아뵈오는 것이 열흘에 한 번은 벗어나지 않았으며, 시종(侍從) 및 여사(女使)가 문안(問安)을 드리는 것이 하루에도 십수 번에 이르렀다. 경술년(1910)이후에 친히 정무를 총괄하는 번거로움이 없으니 고조 광무제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것에 전심하였고 애태우는 일념(一念)으로 경각(頃刻)이라도 해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하늘이 무너지는 재앙을 겪었는데 의약(醫藥)에 힘쓸 겨를도 없었으니,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조아리고 통한이 뼈에 사무쳐서 황황하게 원통하게 부르짖었다. 매매(梅梅)하게 근심하는 모습으로 반열에서도 차마 고개를 들어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종척과 원로(元老) 구신(舊臣)들이 한결같이 위로를 받드는 말을 하여, 지나치게 정성을 다하여 효도를 훼상하지 말도록 요청하니, 제는 비로소 강하게 억제하여, 상을 마치는 절차를 의논하여, 하교하기를, ‘이제 황실의 전장(典章)은 모두 전일(前日)과 달라졌으나 오직 상장(喪葬)의 제도에는 우리 가법(家法)이 있으니 어길 수 없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어려서 예를 익혔고 명물(名物), 도수(度數)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파헤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여러 하집사(下執事)가 오직 명을 따를 뿐 습렴(襲斂)과 최질(縗絰)의 제도로부터 축고(祝告)와 변두의 차례, 의장(儀仗)의 사용, 상설(象設)의 도구도 필히 모두 때에 앞서서 마련했으며 기일에 맞추어 행하였다. 세록가(世祿家)의 자손으로 조금이라도 예에 견해가 있는 사람에게는 사첩(仕牒)을 주어 공축(工祝)의 일을 맡겨서 제사의 의례에 허물이 없도록 하였다. 이는 또한 세신(世臣)을 기억하는 뜻이었다. 5개월간 여막(廬幕)에 거처하고 사시(四時)에 곡읍(哭泣)을 했고 3년 제전(祭典)에 몸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몸소 제사를 행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조석(朝夕)으로 상식(上食)을 올릴 때 번번이 평소에 즐겨 잡수시던 시물(時物)을 생각하여 이를 바쳤으며, 미세하고 작은 일도 반드시 축문(祝文) 중에 넣어 고하였다. 효덕전의 상사(祥事)가 끝나자 태묘에 올려 부묘하였다. 종향(從享)하는 신하를 의논함에 중의(衆議)가 모두 훈척(勳戚)과 평소의 근신(近臣)으로 일을 맡았던 사람에게 귀결되었는데, 제가 말하기를, ‘고 정승(故政丞) 박규수(朴珪壽)의 충려(忠慮)와 신응조(申應朝)의 학문(學問)에 선제(先帝)께서 일찍이 공경하여 접대하였으며, 이돈우(李敦宇)는 일강(日講)에 노고가 있었으며 민영환(閔泳煥)은 충절(忠節)이 뛰어나서 모두 선제(先帝)가 예우한 사람이다. 이 네 사람을 배향(配享)하라.’라고 하였다. 조야(朝野)에서 만족하여 다른 이견이 없었다. 제는 상이 끝난 후에 항상 근심하여 마치 거상(居喪)중에 있는 것 같았다.


갑자년(1924)에 제(帝)의 보령이 51세가 되자, 좌우(左右)에서 청하기를 영조(英祖) 및 고조 광무제의 고사(故事)에 따라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 기사(耆社)에 들어가라고 청(請)하였다. 황제(皇帝)는 오늘날은 옛 시절과 같지 않다며 사양하고 어명(御名)을 날인하지 않았다. 다만 영수각첩(靈壽閣帖)에 짧은 시(詩)를 써서 기념하고 여러 구신에게 화운을 명하였다. 이어서 연회를 베풀고 즐기게 하였으니 또한 임인년(1902)에 행한 성대한 행사를 따른 것이었다. 제는 용모와 원만하고 명석하였으며 성품이 맑고 부드러웠다. 양궁(兩宮)이 돌보아주고 키워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하여 일어나고 거하며 자고 먹을 때 위생(衛生)에 방해되는 것이 있으면 일체 경계하고 신중히 하였다. 이 때에 몇 번 아픈 적은 있었지만 자리에 누울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 또한 근년에 한가하게 몸을 조섭하고 때로는 원유(苑囿)를 거닐었고 날마다 행각(行閣)을 돌아 걸어서 다녔다. 옛날에 증축하여 세운 건물을 보고, 몸이 따라 크게 편안하니 장수할 것이라고 여겼다. 우연히 지난해에 다리 부분에 부종이 나서 병이 생겼다가 나았다가 하는 것이 무상하고 올 봄에 이르러 창(脹) 이외에도 비증(痞證)이 생겨서 먹어도 소화시키지 못하였다. 종척(宗戚) 중에 약을 의논할 수 있는 사람 십 여인을 친히 정하여 매일 밤에 온실(溫室)에 들어와 보호하게 했으며 널리 한의와 양의를 널리 초빙하여 증상에 따라 시술하게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향당(鄕黨) 사회, 여염(閭閻)의 부녀자(婦女子)도 각자 산천의 신에게 정성스런 기도를 올렸으나 응답이 없었다. 옥궤(玉几)의 유언이 곡진했으나 호천(昊天)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 너무 급하였다. 향년 53세였으니, 중년에 그쳤다. 아, 슬프도다. 하교하기를, ‘무오년(1918) 고조 광무제의 상(喪)에는 대행 황제(大行皇帝)가 우리 황실의 옛날 예(禮)를 썼으니 이제 대행 황제의 상에도 또한 이 예를 따라서 써서 많은 유사(有司)는 감히 소홀함이 없게 하라.’ 하니, 유사로서 일을 맡은 사람들은 분주히 직무를 수행하며 대소 의절(大小儀節)을 하나같이 무오년의 전례(典禮)를 따랐다. 5월 2일에 홍릉(洪陵)의 좌강(左岡) 부묘(負卯)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려고 한다. 이보다 앞서 4월 25일 순명 후릉(純明后陵)을 합부(合祔)할 땅으로 옮겨 그대로 유릉(裕陵)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모두 병이 나기 전에 내린 명령이었다. 배우자인 순명황후(純明皇后)는 추증(追贈)된 영의정(領議政) 여은 부원군(麗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따님이시다. 자라면서 집안을 본받았으며 황태자비에 뽑혀 양전(兩殿)을 효로 섬겼으며 덕행(德行)이 극히 갖추어졌으나 불행히도 33세에 돌아가셨다. 후에 황후(皇后)로 추존(追尊)되었으며 황제(皇帝)는 후(后)를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여 행록(行錄) 천여언(千餘言)을 조술하여 정헌집(正軒集) 중에 싣게 하였다. 계비(繼妃)인 지금의 황태후(皇太后)는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해풍 부원군(海豐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따님이시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자태(姿態)가 있었고 점차 자라면서 여사(女士)로서 행실이 있었다. 황태자의 비(妃)가 되고, 그 다음해에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지위가 높다고 해서 분노의 기색을 아랫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으니, 황제(皇帝)가 이를 심히 중히 여겼다. 대궐에 들어온 지 21년동안 궁정(宮庭)에서 나쁘게 평가하는 말이 없었으며 6궁(宮)이 칭송(稱誦)하였다. 지금 졸지에 큰 슬픔을 당해서 상선(常膳)을 들지 못하고 임금을 뵙지 못한 지, 이미 30일이 지났다.



아, 슬프도다. 순종 융희제가 후사(後嗣)가 없다. 황제의 상(喪)을 다스리는 데에 세밀함과 간소함을 모두 지극하게 하고 대소 제사의 예를 모두 몸소 행하였다. 공손하고 묵묵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안색(顔色)과 곡읍(哭泣)을 본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것이 옛날에 끊임없이 그치지 않는 효였다. 아, 제가 총명하고 예지로워서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어진 법과 아름다운 규칙을 깨닫지 않음이 없었다. 마치 우리 전례(典禮)에 정통하고 잘 기억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명신의 고사(故事) 백가의 보계(譜系),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의 관력 정주(政注)의 격식을 환히 아는 것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 같았다. 더욱 성현을 높이고 정도(正道)를 지키고 이단을 배척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예전에 천하(天下)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짐(朕)과 동궁(東宮)은 유교(儒敎)를 종주(宗主)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대개 황제의 학문(學問)은 부모님의 교훈에서 터득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옛날의 유현으로 불려지는 사람에 대해서도 반드시 별호(別號)를 부르고, 그 성명(姓名)을 직접적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성현의 후손으로 먼 지방에 있는 한미한 후손이라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다고 소문이 들리는 사람을 곧바로 수용하여 쓸 것을 오래도록 생각하여 더욱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이것이 제의 호학(好學)이었다. 화순(和順)을 마음에 품고, 화려함을 밖에 드러내어 평소에 빠른 말과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사람을 대할 때도 교만하거나 나태한 모습을 취하지 않는 것에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됨됨이를 한 번 보면 구분해 내고 입으로 비평하지 않으며, 사람의 과실을 보고도 크게 형법(刑法)과 관련되지 않으면 반드시 덮어주고 감추어주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 사이에 알력이 생기면 반드시 두 사람을 화해시켜주고 화평(和平)하게 하였다. 근시관(近侍官) 중에 향곡(鄕曲)에서 온 자는 반드시 그 고을의 일을 묻고, 신료를 대하면 반드시 그의 장점과 맡고 있는 일에 따라 물었다. 그러므로 제와 대답하는 사람을 서로 대화가 어긋나고 막힐 염려가 없이 진심을 각자 다 말하였다. 간혹 상주(上奏)한 내용이 임금의 뜻과 맞지 않더라도 즉시 다른 말을 끌어다가 중지시키고 그 말에서 그 단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랫사람은 관대하게 부리되 몸가짐을 엄하게 하였으므로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갖추어졌고 정사가 가혹하게 다스리지 않았지만 움직임에 반드시 신의로 했으므로, 명령(命令)을 내리지 않아도 거행되었다. 이것이 제의 몸가짐이었다. 평상시에도 누워 하늘을 보지 않았다. 기거하는 정당(正堂)에 고조 광무제의 어진(御眞)을 걸어 놓았는데 두터운 휘장으로 가려놓기는 했지만 그 아래에서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이 황제가 조심하는 것이었다. 관리로서 근무하는 사람이 조그만 잘못이 있다고 해서 쫓아내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쫓아내더라도 그 죄명을 가볍게 하여 행실을 고치도록 했으며, 혹은 후하게 돈을 주어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세신(世臣)의 부음(訃音)을 들으면 안색에 슬픈 기색을 띠었으며, 대가 후예(大家後裔)로 재산을 탕진하여 남은 재산도 없는 자들에게 월름(月廩)을 주어 구제하였다. 한 겨울과 한 여름 홍수와 가뭄에는 백성들이 혹 굶주려 죽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자신이 아픈 것처럼 하였다. 근년에 한강 연안에 수해가 심히 참혹하니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우며 계속해서 전보로 탐지하고 조금 안정되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비로소 수라를 들었다. 정사에서 있어서 사궁(四窮)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우선시하고 은혜가 미세한 생물에게도 미치니 어려서부터 곤충과 벌레 등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이 제의 인자한 마음이었다.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낼 때 매번 친히 제사를 올렸으며, 혹 일이 생겨서 섭행(攝行)하게 될 때는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처럼 탄식하였다. 사관(祠官)이 들어와 일을 고(告)할 때, 옥후(玉候)가 좋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보고를 받았다. 서권(書卷)에 열성(列聖)의 묘호(廟號)가 있으면 반드시 손을 씻고 단정하게 앉아서 펼쳐보았다. 북행(北幸)할 때 문천(文川) 지방에 있는 숙릉(淑陵)의 산록이 멀리 보이니 급히 의자에서 기립하였다가 거쳐간 후에 다시 앉았다. 태묘(太廟) 및 진전(眞殿)에 전알(展謁)할 때마다 각 실위(室位)를 지날 때마다 국궁(鞠躬)하고 구주(口奏)하였는데, 가까이 모시는 사람도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 능에 오르실 때에 혼유석(魂遊石) 앞에 나아가서도 또한 그처럼 하였으니 생각건대, 출입(出入)하는데 항상 고(告)하는 의리였을 것이다. 이는 제가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에 양궁이 병이 있으니, 안색에 근심스런 모습을 띠고 의대도 풀지 않고 양궁께서 잠자리와 음식이 회복된 연후에야 황제도 또한 처음과 같이 하였다. 심상한 음식물도 반드시 먼저 올리고 어른이 드신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



창덕궁(昌德宮) 북원(北苑)에 곡식을 심어 익으니 근시(近侍)를 거느리고 원(苑)에 가 곡식을 베어 거두었다. 곡식이 매우 굵고 윤택하여 근시들이 내려주기를 바랬다. 며칠이 지나서 모두 경운궁에다 바쳤다는 말을 듣고서 서로 감탄하였다. 임금이 상중에 있었을 때, 인정전(仁政殿) 뜰에 모란꽃이 무성히 피었으므로, 명령을 내려 휘장을 넓게 펴서 꽃이 보이는 것을 가리게 하였다. 시절마다 홍릉에 가서 성묘하고 이미 사능례(辭陵禮)를 행하고 또다시 능에 올랐다. 하루는 비가 갑자기 퍼부었는데 따라 나온 여러 신하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피하지 않고 비를 무릅쓰고 갔다. 의대가 모두 젖어도 개의하지 않았다. 홍릉을 감수(監守)하는 사람이 능 앞에 전에 심어진 버드나무의 윗가지를 쳤는데, 황제가 이를 듣고 저녁 음식을 물리치고 들지 않았다. 대개 감수하는 사람은 그 나무를 잘 자라게 하려고 윗가지가 뻗어난 것을 자른 것이며 고의로 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 역시 이 사실을 알고는 벌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능의 나무에 도끼질을 한 것이 마음에 편하지 않았으므로 음식을 물리친 것이었다. 나이든 궁인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우연히 선조(先朝) 때의 국사(國事)가 어떻다고 말하니, 즉시 엄하게 꾸짖어 물러가라 명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감히 선황제(先皇帝)의 일을 논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궁녀배(宮女輩)들이 감히 선조(先朝)에 대해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선조때에 일을 맡은 신하들을 반드시 예우하고 혹은 과실이 있더라도 곧바로 위벌(威罰)을 가하지 않았다. 낮은 자도 또한 높게 접대하고 후히 베풀어주었다. 옛 사람이 삼년 동안 아버지의 신하를 바꾸지 않고 함께 정사를 하는 것은 성인도 오히려 효로 인정하였는데, 제는 종신토록 고치지 않았다. 칠정(七情)이 일어남과 만선(萬善)이 생겨나는 것에서 일용(日用)에서 상행(常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성효(誠孝)에 기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효심(孝心)을 확대하여 우애에 돈독하니 현재의 사왕 전하가 멀리 유학할 때 전보(電報)와 엽서가 빈 때가 거의 없었고, 방학 때에 귀근(歸覲)할 때면 선보(先報)를 듣고 기쁜 안색을 띠었으며 책상에 마주하여 밤새 정담이 계속되었다. 매번 이별할 때면 슬퍼하며 차마 이별하지 못하는 뜻을 보이니 좌우가 감동하였다. 덕혜옹주(德惠翁主)는 부황(父皇)의 만년에 태어나니 특별히 귀여워하여 길렀다. 처음 어렸을 때 모사(姆師)를 초빙하여 궁 안에서 교육하고 조금 자라자 유학을 보냈는데, 가까이로부터 멀리까지 늘 염려하였다. 대개 인륜(人倫)에 돈독한 것은 지성(至性)에서 나온 것이니 억지로 힘써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제가 효우(孝友)에 지극한 것이다. 재백(財帛)과 주옥(珠玉)과 성색(聲色), 기호품에 대해서는 담백하여 욕심이 없었고, 성부(城府)의 법식(法式)이나 일체의 기관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교만하고 과장된 기색이 없었으며 상스러운 말과 편협한 말은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한 가지 일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한마디도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성현의 자품(姿稟)이고 인군(人君)의 도량(度量)인데 제가 실제로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정(庶政)을 총람(總覽)기간이 4년을 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행실과 높은 덕을 역사에 이루 다 쓸 수가 없고 깊고 두터운 혜택이 백성에게 두루 미쳤다. 돌아가신 날에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돈화문(敦化門) 밖에 모여 곡(哭)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고 공상(工商)의 무리와 학교의 아이들은 학업을 폐하고 마치 부모(父母)의 상처럼 달려왔으며 나무하는 아이와 밥 짓고 물을 긷는 비(婢)들로 평생 황제의 힘이 어떠한지 모르는 자들도, 모두 달려와서 통곡하엿다. 7일에 성복(成服)한 이후 황량한 벽지와 먼 해변지역, 시골과 산골 사이에서 모두 그러하였다. 외국인들도 모두 보고 탄식하기를, ‘성인이 상을 당했도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역대(歷代) 제왕(帝王)의 상에도 없었던 일이다. 아, 슬프도다. 제가 불세출(不世出)의 성인으로 고조 광무제가 이룬 중흥(中興)의 황업을 계승하여 통치하신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다스림과 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하늘이 오랜 수명을 주시어 그 뜻하는 일을 끝마치게 했더라면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융성한 시대에 이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하지를 못하니, 아, 애석하도다. 그러나 제가 말세의 운(運)을 만나서 어려운 대업(大業)을 맡아서 이루지 못한 일을 행하였다.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넓은 도량으로 묵묵히 움직여서 정도와 권도를 참작하여 변화에 대처하기를 평상시와 같이하고, 천하를 사사로이 여기지 않았다. 지극한 덕을 능히 이름할 수가 없는데 예전에 천명(天命)을 즐기고 천하를 보전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황제의 경우에 해당된다. 이는 4년 동안의 정사(政事)로 백성들이 백세(百世)가 지나도록 잊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제가 유민(遺民)에게 이를 얻은 것은 다른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피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성경(誠敬)과 인효(仁孝)가 그 가운데 있으니 이는 후황(後皇)에게 본받을 만한 훈계 감계(鑑戒)가 되기에 충분하다.”하였다.전 홍문관 학사(弘文館 學士) 윤덕영(尹德榮)이 제술(製述)하였다.
2012-10-15 1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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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얼 2018-08-29 20: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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