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사직단(社稷壇)
 김민수
 2012-06-13 23:35:25  |   조회: 2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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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 의식을 행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태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고, 태조 4년(1395) 정월부터 공사를 착수하였다. 사직에 올리는 중요한 제사는 4대향(四大享)이라 하여 풍년을 빌기 위해 정월 상순 신일(辛日)에 지내는 제사인 기곡(祈穀), 2월과 8월의 상순 무일(戊日)에 행하는 중삭(中朔), 동지 뒤의 셋째 술일(戌日 또는 未日)인 납일(臘日)에 한 해 동안 지은 농사 형편을 신에게 고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 납향(臘享)이 있었고 홍수나 한파, 유행병과 전쟁에 행하는 기제(祈祭)·책봉(冊封)·관례(冠禮)와 혼례(婚禮)에 행하는 고제(告祭)의 소사(小祀) 등이 있었다.

사직단(社稷壇) 주변에 동ㆍ서ㆍ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신실 등은 모두 불타버려 선조 말년에 수복(修復)되었고 신문(神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단(社壇)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주척(周尺)으로 높이 2.5척, 폭 1척의 돌기둥을 각기 세워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배향(配享)하였고 1897년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하였다. 네모난 단으로 세벌대 장대석(長臺石)을 높이 3척되게 하고, 한 변이 2장 5척(二丈 五尺)의 크기로 평면을 설정하였고,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네 귀퉁이에 햇볕을 가리는 차일(遮日)을 칠 때 이용하기 위하여 박혀 있는 구멍난 돌에 큰 쇠고리가 꽂혀 있다.

사직단(社稷壇)의 관리와 청소를 담당하던 관청이 사직서(社稷署)이며 조선 전기에 사직단을 두었다가 세종 8년(1426)에 사직서로 고치고, 경국대전에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이 겸임하는 도제조(都提調) 1명과 정 2품 관리가 겸임하는 제조(提調) 1명, 영(令) 1명, 참봉(參奉) 2명을 두도록 했다. 사직서(社稷署)에서 숙직하는 관리는 5일마다 사직단과 흙담을 어명을 받들어 보살펴야 하며,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는 봉상시(奉常寺) 안에 신위(神位)를 모신 방인 신실(神室)도 보살펴서 고칠 곳은 예조(禮曹)에 보고해야 했다. 해마다 정월과 7월 호조·예조·공조의 낭관(郞官)이 사직단과 토담과 신실을 살피도록 했으며 사직단의 받침돌이 무너졌거나 신실이 샐 경우에는 제조(提調)가 살펴보고 예조에 알린 뒤 따로 길한 날을 택해 예조·호조·공조의 3판서(判書)와 함께 바로잡도록 했다.
2012-06-13 23: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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