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척화비(斥和碑)
 김민수
 2012-06-13 23:25:36  |   조회: 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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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斥和碑)



흥선대원군이 1866년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중국 톈진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의 천주교도 학살을 알렸으며 보고를 받은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한반도 진격을 표명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邊境)의 수비를 굳게 했다. 9월 18일 로즈 제독의 프랑스 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고 조선 정부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 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했다. 10월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으며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의궤 · 전적 등을 약탈했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정찰하려다 잠복중인 한성근(韓聖根) 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鼎足山城)을 공략하려다가 잠복 중인 양헌수(梁憲洙)가 이끈 500명 사수들에게 사격을 받아 사망 6명,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1866년 8월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주청전권공사 로우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 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19일 남양만(南陽灣)에 도착한 미군은 물치도(勿淄島)를 함대의 정박지로 정했다.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江華島)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덕진진(德津鎭) ·광성보(廣城堡)를 차례로 점령하였으나 6월 11일의 어재연(魚在淵)이 지킨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도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勿淄島)로 철수했다. 프랑스,미국과의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이를 온 백성에게 일깨워 주고자 1871년 전국의 주요 지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도록 했으며 임오군란(1882)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이어 개항을 맞게 되자 대부분이 철거되고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척화비는 네모나게 깎은 돌의 모서리를 자른 간단한 형태이며 굵은 글씨로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그 옆에 “자손 만대에 경고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라는 작은 글씨를 새겼다.
2012-06-13 23: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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