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어보(御寶)는 어보(御寶),국새(國璽)는 국새(國璽)
 김민수
 2012-05-09 23:43:42  |   조회: 2374
첨부이미지

김민수

ssk0102@hanmail.net

01030117613

어보(御寶)는 어보(御寶),국새(國璽)는 국새(國璽)


어보(御寶)는 어보(御寶),국새(國璽)는 국새(國璽)



김민수 전 문화재청 고궁박물관 연구원



조선국의 왕권을 상징하고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제작한 어보(御寶)는 조선국 국왕과 왕후의 덕을 기리는 존호(尊號)와 승하하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諡號) 등을 새겼으며 추가로 존호나 시호를 올릴 때마다 어보를 새로 제작하였고 존호를 올리는 의식 등에 사용하고 태묘(太廟)에 봉안했다. 존호를 올릴 때 어보와 함께 국왕,왕후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어책(御冊)을 함께 봉안하였다.어보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방형(方形)의 보신(寶身)과 거북이·용 등이 조각된 보뉴(寶鈕)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보뉴의 거북이가 황제의 상징인 용으로 바뀌게 된다. 보신의 바닥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보면(寶面)이라고 한다. 보뉴에는 어보를 잡기 편하게 하면서도 장식성을 더한 인수(印綬)가 있으며 영자(纓子), 방울, 술로 구성되어 있다. 어보의 높이는 9.6㎝, 무게도 4㎏에 달하였고 구리와 은을 54:23으로 혼합하였다. 국새보다 큰 어보는 어보를 넣는 내함인 보통(寶筒), 보통을 넣는 외함인 보록(寶盝),어보(御寶)·보통(寶筒)과 보록(寶盝)을 싸는 보자기와 이를 묶는 끈으로 이루어지며 어보함 표면에 방형의 교어피(鮫魚皮:상어 가죽) 조각을 이어 붙였다. 어보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국새인 대보(大寶), 의례용 어보로 나누어지는데 대보(大寶)는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위 계승이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다. 중국은 조선 국왕의 즉위나 왕후,왕세자 책봉 시 승인하는 고명(誥命)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보내고 조선국은 이 인장을 국가와 국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로 사용하였다.

세종 대부터 국왕행보(國王行寶), 국왕신보(國王信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과거지인(科擧之印), 유서지보(諭書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의 7가지 어보(御寶)를 자체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영조 대부터 고조 광무제 대까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한 대보(大寶), 교명(敎命)·교서(敎書)·교지(敎旨)에 사용한 시명지보(施命之寶), 관찰사,절도사의 임명 교서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 과거시험 답안지 시권(試券) 및 과거시험 급제 증서 홍패(紅牌)·백패(白牌)에 사용한 과거지보(科擧之寶), 어제(御製)에 사용한 규장지보(奎章之寶) 등 10과의 어보(御寶)가 있었다. 어책(御冊)은 국왕·왕후·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존호(尊號)를 올리는 문서로 존호(尊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옥(玉)에 새겨 놓은 옥책(玉冊)과 존호를 새긴 금보(金寶)를 정해진 의식과 함께 올리며 이를 책보(冊寶)라고 한다. 어책문(御冊文)은 올리는 사람, 일시, 존호(尊號), 그리고 존호를 받는 사람을 칭송하는 송덕문(頌德文)을 간략하게 쓴 후 어책문을 저술한 제술관(製述官)과 필사한 서사관(書寫官), 어보(御寶)의 글씨를 쓴 사자관(寫字官)의 이름을 기재했다.

1897년 10월 12일 고조(高祖)가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1대 광무제로 등극하여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어새(皇帝御璽),황제지보(皇帝之寶),칙명지보(勅命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시명지보(施明之寶),대원수보(大元帥寶),원수지보(元帥之寶)를 새로 제작하였다. 러일전쟁을 예견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3년 독일,이탈리아,러시아 황제,프랑스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일제가 1904년 2월 23일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프랑스 대통령,독일,러시아,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한 황제어새는 2 종류인데,한 종류는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다른 한 종류는 1906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유리원판 사진만 남아 있다. 대한국 초기에 제작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1903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국새(國璽)ㆍ어새(御璽)는 내대신(內大臣)이 관리하는 것이나 러일전쟁 발발 징후 등 대한국의 정치적인 상황때문에 고조 광무제가 국새를 비장(秘藏)하였다.

2012-05-09 23:43:42
124.53.159.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