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대한국 황궁 경운궁(慶運宮) 궁호 환원은 역사적 당위
 김민수
 2011-12-11 17:13:34  |   조회: 2137
첨부이미지

김민수

ssk0102@hanmail.net

01030117613

대한국 황궁 경운궁(慶運宮) 궁호 환원은 역사적 당위

대한국 황궁 경운궁(慶運宮) 궁호 환원은 역사적 당위




김민수 전 고궁박물관 연구원 / 현 문화재칼럼니스트




일본(日本)이 조선(朝鮮)을 침입(侵入)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평안도 의주로 피난하였다가 한성(漢城)으로 환도(還都)한 조선 14대 국왕 선조가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를 국왕의 시어소(時御所)로 쓰면서 궁(宮)이 되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한 후 15대 국왕 광조(光祖)가 이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면서 궁호(宮號)를 경운궁(慶運宮)으로 명명(命名)하였다.1897년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의 남쪽 황단(皇壇)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국(大韓國)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國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에 이어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었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종묘를 태묘(太廟)로,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하여 고쳤으나 일제 통감이 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부정하며 황태자에게 대리청정 명령하고 경운궁(慶運宮)을 조선시대에 상왕들의 궁에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로 격하시켰다. 20세기 초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나라도 대한국이고 1945년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한 나라도 대한국이므로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의 환원은 완전한 대한 광복을 위한 역사적 당위이다. 1895년 이토 일본 총리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에 살해된 왕후 민씨(閔氏)를 대한제국(大韓帝國)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였으며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황태자(1919년 1월 고조 광무제 붕어(崩御) 후 2대 황제 등극한 순종 융희제)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비로소 거행하였고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였다.

1897년 9월 26일 외부 협판(外部 協辦) 유기환(兪箕煥), 충청도 유학(幼學) 심노문(沈魯文) 등이 황제(皇帝)로 칭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9월 28일 시독(侍讀) 김두병(金斗秉)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다.9월 29일 김규홍(金奎弘)이 황단(皇壇)을 설치할 장소를 택정할 것에 대해 간심하겠다고 아뢰었다.김재현(金在顯)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9월 30일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이하가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고 진사(進士) 이수병(李秀丙) 등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다.10월 1일 황단(皇壇)을 설치할 장소를 간심(看審)하였다. 심순택(沈舜澤) 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황제로 칭할 것을 아뢰었다.10월 2일 승지(承旨) 김선주(金善柱) 등이 상소를 올려 황제로 높여 부를 데 대하여 청하였다.10월 3일 심순택 등이 정청하여 다시 황제라고 부를 것을 아뢰었다.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 이하가 황제 국가의 제도에 대해 아뢰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황후를 책봉하며 태자를 책봉하는 날짜를 정하였다.10월 7일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太極殿)으로 고쳤다.궁내부 관제 가운데 황단 사제서 증치 건을 반포하였다.10월 8일 사직단의 위판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쓰도록 하였다.10월 12일 황제(黃帝)의 자리에 오르고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산호만세(山呼萬歲) 등을 창하였다.10월 13일 진하를 받고 칙서를 반포하여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였다.대시령(待時令)을 내려 중죄인들의 죄를 가볍게 해주었다.10월 14일 태극전에 나아가 명헌태후(明憲太后)에게 옥책과 금보를 올리고 왕태자비 민씨를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10월 16일 태묘(太廟)에 삭제(朔祭)를 지낼 때 헌종실과 철종실에 대한 칭호를 정하였다.12월 2일 고조 광무제가 대한국 황제에 즉위한 날을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로 칭하였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는 일본의 대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일제는 1904년 2월 8일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제국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제(日帝)는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9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불법 늑결을 대한국 정부에 강요했으며 11월 17일 불법 늑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자가 통감이라고 규정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한 여러 사무를 관장한 일제 통감은 일왕에 직속하고 외교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었고 통감은 대한제국의 일본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업무를 감독하고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었다.1906년(광무 10) 2월 1일 일본제국주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여 한국 수비군을 통수하는 원수의 자격을 겸임,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전시 편제 무력을 주둔시키고 경찰기구도 강화시켜 나갔다. 일본인 경찰고문이 5명에서 678명으로 급격하게 늘었으며, 경찰 수도 1,851명에 이르게 되었고 헌병대도 강화시켜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 이후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반을 이루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불법 늑결,통감부 설치 이후 대한제국 국권 회복을 위한 한민족의 저항이 대한독립운동·계몽운동과 같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으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 반일 상소, 자결이 계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불법 늑결 후 1906년 설치된 일제 통감부가 1907년 헤이그 특사 처벌,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부정하며 일제 통감이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경운궁(慶運宮)을 조선시대에 상왕들의 궁에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로 격하시켰으므로 문화재청은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를 환원, 재지정해야 한다.1907년 일제 통감이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한 후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일제 통감은 대한제국을 불법 병합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황태자에게 지방을 순행(巡幸)하게 하며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대리청정기간은 고조 광무제의 치세(治世),일제 통감부의 강박에 의한 것)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1919.1-) 즉위(고조 광무제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한 것을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이 황제 양위로 둔갑)로 왜곡,선전하였다. 1623년 16대 국왕 인조가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2월 20일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대한국 황궁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대한국 황궁(皇宮)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1900년 궁장(宮墻) 공사가 완성되고 1901년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議政府)를 연결하는 운교(雲橋)가 가설·개통되었으나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殿閣)이 소실되었고 1905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경운궁(慶運宮)은 경희궁 사이에 후원(後苑) 상림원(上林苑)과 궁장(宮墻),영성문(永成門) 포덕문(布德門) 대안문(大安門) 인화문(仁化門)의 4대문이 있으며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조(高祖) 광무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조 광무제가 등극한 태극전(太極殿), 귀빈을 접견하던 편전 덕홍전(德弘殿),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접견실·연회장 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환벽정(環壁亭),황태자가 대리청정 시작한 돈덕전(惇德殿), 고조 광무제의 침실과 접견실 석조전(연지(蓮池),거북상),명성황후의 혼전(魂殿) 경효전(景孝殿),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興德殿),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가 붕어한 석어당(昔御堂), 고조 광무제가 외국 사절을 접견한 준명당(浚明堂),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 대한국 황실 사무와 근대적 광무개혁을 추진한 궁내부(宮內府),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가 있다.


2011-12-11 17:13:34
124.53.159.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